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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밤에 창문을 여는 것은 이제 버릇이 아니라 일상에 가까웠다. 차가운 공기에 숨이 어린 것도 벌써 먼 날의 일이 되었다. 창을 열고 뺨을 두드리는 시린 바람이 정신을 깨우면 저무는 하늘 끝을 물들이는 검은 빛이 보였다. 밤의 문이 열리는 것은 결코 느린 속도가 아님에도 타마키는 언제나 초조해졌다. 조금 더 빨리 달려 와주면 좋을 텐데. 닿지 않을 투정을 부리며 타마키는 어깨에 두른 요를 여몄다.

 

 지평선이 가장 잘 보이는 방은 그만큼 높고 추워 어떤 용도로도 쓰이지 않던 방이었다. 그렇기에 어린 왕이 그 방으로 거처를 옮기겠노라 했을 때 말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 누구도 왕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무언가를 넣을 만큼 넓은 방도 아니었던지라 그가 방을 옮기며 챙겨간 것은 두툼한 이불 한 채와 옷 몇 벌, 몸을 뉘일 해먹뿐이었다. 본래 행동에 독특한 면이 있던 이인지라 결국 사람들은 또 괴상한 짓을 한다며 혀만 차고 말았다. 그 행동에 크게 관심을 두는 자는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타마키에게는 기꺼웠다. 비밀에게 관심은 늘 달갑지 않은 관찰자였으므로.

 

 그렇게 모두의 시야에서 벗어나 타마키는 늘 성의 가장 높은 곳에서 밤을 기다렸다. 무료한 얼굴로 창틀에 기대고 있노라면 지평선 너머에서 햇빛이 걷히고 어둠이 점차 물들었다. 그렇게 얼굴 한가득 은빛이 부서져 물들면 왕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 붙은 졸음도 한달음에 쫓아낸 채 몸을 창밖으로 내밀면 다가오는 달빛 속에 검게 흩날리는 말의 갈기가 보였다. 타마키의 비밀이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타마키 군.”

 

 부지런히 남은 빛을 쫓아내던 세 마리의 말이 걸음을 멈추면 은색 마차에서 빛이 내려왔다. 타마키는 환하게 웃으며 그것을 품에 안았다. 초저녁의 시린 온도가 품에서 녹아내리면 빛이 걷히고 그리운 얼굴이 드러났다. 그대로 해먹에 드러누운 타마키가 조심조심 손을 뻗어 앞머리를 걷어내면 답지 않게 이를 드러내어 웃는 말간 얼굴이 보였다. 긴긴낮의 기다림이 끝나고 찾아온 짧은 밤이었다.

 

 소고가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말들은 성미가 급했고 쳐야 할 밤의 장막은 아직도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다. 10분이라는 시간 동안 모두 말하기에 둘에게 쌓여있는 이야기는 바다만큼 깊었고 물꼬를 트면 넘칠 것이기에 그들은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품에 안고 있으면 짧은 시간마저 찰나처럼 지나간다.

 

 다르게 뛰고 있던 심장박동이 서로의 소리에 맞추어 하나가 되면 창밖에서 말이 길게 울며 떠날 시간을 알렸다. 온 하루를 꼬박 새워 만난 연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밖에 없었다. 타마키는 언제나 아쉬운 표정으로 소고의 손을 잡아끌었으나 인간에 불과한 그가 감히 달을 붙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고는 있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아까운 것은 아니지만.

 

 젊은 왕이 차마 손을 놓지 못하고 하염없이 그를 바라보면 소고도 그를 마주하며 함께 안타까운 얼굴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소고는 언제나 애달픈 마음만을 남긴 채 야속하리만큼 단호히 말을 몰아 떠났다. 이러한 만남이 반복된 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타마키도 이제는 그의 곁에 연인을 붙들어 놓는 것을 포기하였다. 하지만 그리움이라는 것은 끊어내고 싶다고 하여 마음대로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의 신에게 언제나 애원했다.

 

 “떠날 거라면, 입맞춤이라고 남기고 가줘.”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성난 말들이 발을 구르며 출발을 재촉하는 소리에 다급해진 소고는 미안하다는 말만을 남긴 채 이마에만 가볍게 입을 대곤 황급히 말을 몰아 떠났다. 입맞춤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이라도, 살갗에 닿은 그의 호흡만으로도 타마키는 기꺼웠기에 기어이 그 아쉬움을 감내할 수 있었다. 아마 오늘도 소고의 답은 다르지 않으리라고 타마키는 예상했다. 그는 거절의 말을 기다리며 소고의 손을 잡아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은 오지 않았다. 말들이 조급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콧소리를 내며 분을 토해도 제 손에 닿은 온기는 떨어지지 않는다. 익숙지 않은 정적에 타마키가 눈을 뜬다. 고개를 드니 시선을 떨구고 한없이 망설이는 표정을 한 연인이 보였다. 파리해진 입술이 무어를 말하려는 지 한참을 떨어지지 못하다 간신히 말을 토해낸다.

 

 “입맞춤을, 해주길 원해?”

 

 평소와는 다른 대답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타마키는 크게 눈을 떴다. 침묵을 오해했는지 소고가 입술을 축였다. 몸을 숙여 해먹에 앉은 연인과 눈을 맞춘 소고는 깊이 한숨을 쉬다 간신히 말을 이었다.

 

 “타마키, 나의 입맞춤은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겁고 무서운 의미를 담고 있을 거야. 그래도 괜찮아? 너는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무슨 의미일까. 맞닿은 손끝이 차가워 우선 꾹 쥐었으나 타마키는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웠다. 소쨩, 그거 무슨 의미야? 무겁고 무섭다니?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하나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타마키는 소고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그의 귀에 날아온 단 한마디 말이 그 모든 혼란을 말끔히 씻어냈다.

 

 

 ……영원히 나와 함께 있더라도?

 

 

 “영원히 함께 있겠다는 말, 무슨 뜻이야?”

 

 놀라 절로 몸을 앞으로 당기자 소고는 한 걸음 뒤로 몸을 물렸다. 놓치지 않고 허리를 붙잡자 시선을 피한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타마키의 팔 안에 붙들렸고 도망칠 곳은 없었다. 말없이 대답을 독촉하는 눈빛에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소고가 이내 체념하고 타마키의 뺨에 손을 얹었다. 고개를 들자 가라앉은 시선이 마주한다. 드물게 한참 말을 고르던 소고는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타마키 군, 있잖아.

 

 “타마키 군은 나와 더 오래 함께하고 싶어?”

 “응.”

 “네 모든 재산과 명예를 버린다 해도?”

 “응.”

 “나와 함께 하는 시간에는 네게 그만한 가치가 있어?”

 “소쨩은 나와 함께 있는 게 싫어?”

 “……그건, 아니지만.”

 

 두 사람의 무게가 더해진 해먹은 평소보다 더 깊게 가라앉았다. 아슬아슬한 거리를 두고 닿지 않는 숨결에 말발굽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소쨩, 나는 있잖아. 타마키는 부러 목소리를 작게 낮추어 속살거린다.

 

 “소쨩이 하는 말이 솔직히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쨩이랑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난 그걸로 좋아. 소쨩이랑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차가운 손가락이 눈가를 쓸었다. 타마키는 그 손길에 고분고분 따르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물씬 가까워진 얼굴에 가슴이 크게 고동쳤다. 품 안의 달빛은 눈이 멀 듯 밝았지만 이 안에 잠길 수만 있으면 죽는대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양 뺨을 붙든 손이 조금 떨리는 듯하더니 곧 힘을 주어 세게 얼굴을 붙들었다. 잠깐이면 돼, 타마키 군. 잠깐이면……. 등을 쓸어주는 손길에 정신을 맡기고 있으려니 입술에 살결이 느껴졌다. 피부와는 묘하게 다른 느낌의 것. 타마키는 소리 없이 숨결을 갉아 먹히는 감각에 온전히 저를 내어주었다.

 

 숨을 나누는 시간이 억겁처럼 길었다. 제 손목을 붙든 손의 힘이 점차 빠져나가자 소고가 몸을 뒤로 물렸다. 지지해주던 몸이 빠지자 청년의 몸이 해먹 위로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간신히 오른손만을 쥔 채 소고는 가로 길게 누워 영원한 꿈에 빠진 연인을 보았다. 흩어진 앞머리를 정돈하니 훤칠한 이마가 드러난다. 소고는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몸에 두른 천을 벗어 청년을 감싸고, 손을 뒷목과 허벅다리를 받쳐 안아 들자 왕의 몸이 그대로 떠올랐다. 신은 더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제 품에 안긴 연인을 내려다보았다. 갓 잠에 빠진 어린아이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그는 마차로 향했다. 그에 잠든 연인을 실은 후 소고는 고삐를 쥐고 있는 힘껏 말의 몸에 내리쳤다.

 

 빨리 오지 않던 주인에게 단단히 화난 말들은 내리쳐지는 채찍에 놀라 날뛰었다. 난폭한 움직임에 밤의 장막이 어지러이 풀어져 대지를 향해 추락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햇빛을 기이하게 여기며 하늘을 보던 사람들은 그대로 흩날려 내려온 장막에 깔렸다. 온 나라를 감싸듯 사람들을 덮은 장막은 숨이 붙어있는 자 모두를 영원한 잠의 세계에 몰아넣었다. 채 가라앉지 않은 낮의 소리로 들뜨던 거리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모든 이들이 잠든 거리에는 끊어질 듯 위태로운 숨결만이 남아있었다. 그를 내려다보며 소고는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진정된 말들이 다시 마차를 몰며 걸음을 박차자 소고는 연인의 몸을 제 무릎에 뉘이고 끌어안았다. 기분 좋게 따스한 온기가 도는 몸에는 여전히 생기가 돌고 있었지만 청년은 말이 없었다. 그가 간간히 고요하게 내쉬는 숨만이 목숨이 붙어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그를 끌어안고 있던 소고가 이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죽음보다도 깊은 잠에 빠져 일어나지 않는 연인에게 하염없이 이마를 비비며, 그는 몇 번이고 행복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는 정말로 함께야, 타마키 군. 영원히 함께…….

요츠바 타마키 x 오오사카 소고 

(엘리스의 왕.엔디미온 x 달의 여신.셀레네)

♣  단비님 (@taku_b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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