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P : 야오토메 가쿠 x 나나세 리쿠
피어나
릴리(@LillyChouChou13)
강철(强鐵)의 별 라마. 라마는 화산과 강철의 별이다.
수많은 화산과 수많은 광물이 존재하는 별. 화산과 광물의 무수함은 곧, 강인함이라는 물질 명사의 구체화와 같았다. 이는 라마인들의 자부심이었지만,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라마는 척박의 땅이라는 소리였다. 토양은 대부분이 화산토로 이루어져 거칠고, 밤이 세 번이나 찾아오는 별. 이 별에서 식물이 생장하기 힘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잡초조차 충분하게 자라지 않으니 목축을 할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라마인들은 짧은 봄에 최대한 돌을 고르고 땅을 다져 곡식을 심고, 이른 가을에 추수를 하여, 긴 겨울을 겨우 보냈다. 그들은 긴 밤을, 긴긴 겨울을, 버텨내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돌아올 봄, 베스티아 상인들에게 팔아넘길 철기구를 만들면서, 새빨갛게 달궈진 철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척박의 땅, 유일한 향기는 높다란 서쪽 성벽 너머, 그 성벽 너머, 새장 속에 있다네. 그 가파른 향기를 꽃이라 부른다지.
——그런 노래가 있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
가쿠는 천천히 위를 올려다 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지키려는 듯 혹은 가두려는 듯 예리하게 벼려진 높다란 창살문 위를, 그 위로 높다랗다 못해 위태롭게 뻗은 첨탑을, 벌써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첨탑의 꼭대기를, 차례로 지긋이 노려보았다. 창살문엔 검붉은 녹이 슬어 있었고, 첨탑은 군데군데가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꼭대기층 테라스로 어둑하게 보이는 인형(人形). 이 서쪽 첨탑의 주인이었다.
서쪽 첨탑, 이곳의 주인은 전 제3황자, 였다. 오로지 전 황제와 몇 명의 하녀들만 드나들었던 서쪽 첨탑은 가신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새장’이라 불렸다. 하지만 황제가 바뀐 지금, 이곳은 전 제3황자가 유폐된 감옥에 불과했다. 가쿠는 이가 나간 나선형 계단을 오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전 제3황자는 3년 전 돌연 나타났다. 전 황제가 대뜸 어디선가 데려온 아이였다. 전 황제는 아이를 자신의 자식이라 주장하며 갑자기 제3황자의 자리에 앉혔고, 대신들은 반발했다. 그야 당연했다. 황자의 자리에 앉는다는 건,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라마 제국은 수없이 많은 전쟁과 내전을 겪어왔지만, 단 한 번도 황제의 핏줄이 바뀐 적이 없는, 강철만큼 굳건한 세습사회다. 돌연히 나타나 제3황자 자리를 꿰차는 것도 기가 찬 일이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큰 반발을 일으킨 건 아이의 외형이었다. 아이는 도저히, 아무리 보아도 라마인이 아닌 이형의 존재였다, 고 전해진다. 전 황제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있던 대신들은 모두 죽었기에 그저 그렇게 전해질 뿐이었다.
전 황제는 성군이 아니었다. 반발하는 이들의 목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가 손짓을 까닥이면 황제직속기관 친위대가 많은 목들을 베어냈다. 가쿠는 친위대 병사로서 죄인들의 피로 손을 적셔왔다. 죄목은 반란죄, 황제기만죄, 암살시도 등 다양했지만, 가쿠는 어렴풋이 알았다. 이 중의 대다수가 거짓되었다는 걸.
갑작스럽게 전 황제가 의문사하고, 제1황자가 황제가 된 지금, 위태롭던 전 제3황자의 입지는 더더욱 흔들리고 있었다. 황제는 전 황제보다 온화하고 명석했다. 전 제3황자를 무작정 죽이라는 명령따윈 하지 않았다. 대신 전 제3황자에게 직위를 내렸다. 황제직속기관 친위대 소속 병사라는, 아주 명예롭고, 매우 자랑스러우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직위를 내렸다. 오늘은 전 제3황자이자 친위대 소속 소장 리쿠의 첫 출정 날이었다.
——가쿠, 친위대 대장으로서, 내, '동생'을 잘 부탁하네.
그렇게 말하던 황제는 웃고 있었던가. 금실과 진주로 엮은 발 너머 희미한 황제의 실루엣은.
가쿠는 무심코 머리를 짚었다. 굉장히 골치 아픈 임무에 걸려들었다. 길고 긴 계단의 끝에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다. 과연 감옥 같군, 이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언뜻 노래가 들리는 듯했다. 삭막한 담과 철장으로 둘러싸인 부지, 삭막하고 보수조차 되지 않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그저 높기만 한 첨탑.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알까. 이곳이 이렇게 삭막하다는 것을. 그리고 언제 피로 젖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가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문을 두드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밀었다. 낡은 철문이 끼기긱- 비명을 지르며 열렸고, 인형(人形)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형의 존재, 로 전해지는 이의 모습은, 그저 아이, 라는 인상에 지나지 않았다. 붉은 머릿칼을 가진 아이가 무방비하게 테라스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조그맣게 입을 벙긋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그 너머로 어둠에 짓눌린 노을이 지평선에 간신히 존재했다.
이윽고 노래마저 노을처럼 가라앉고, 침묵이 어둠처럼 내려앉는 순간에, 아이는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려 가쿠를 바라봤다. 정확하게 가쿠의 눈을 쳐다봤다. 붉은 눈동자, 그 눈동자가 가쿠를 가득 담았다. 왠지 모를 아찔함에 가쿠는 서둘러 한쪽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황제직속기관 친위대 소속 대장, 가쿠가 황자님을 뵙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직까지 황자의 신분이었기에 아이를 빤히 바라본 것에 대해 사과를 했다. 아이를 오늘부로 황자의 신분에서 끌어내린다는 칙서를 가지고 온 가쿠는, 이것을… 이라고 말끝을 흐리며 칙서 또한 황자에게 올렸다. 칙서를 가져가는 손은 가쿠의 예상보다 작고 가냘팠다. 작은 손이 부스럭, 부스럭, 종이를 봉하는 밀랍을 떼어내고, 부스럭, 부스럭, 그 속에 든 편지를 꺼내들었다. 지금 이 기점으로, 아이는, 더 이상 황자가 아니었다. 아이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가쿠는 얼굴을 들었다. 마침 편지에서 고개를 든 아이와 가쿠의 눈이 허공에서 만났다. 아이의 눈이 투명하게 가쿠를 담았다.
저는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칙서에 담긴 황명은 두 가지였다.
첫째, 제3황자 리쿠를 황제직속기관 친위대 소장으로 삼는다는 것.
둘째, 찾아오는 첫밤에 신황 암살을 목적으로 경비가 허술한 서쪽 첨탑으로 침입할 반란군을 제거하라는 것.
라마의 밤은 달이 뜨는 첫밤, 별이 뜨는 이틀, 아무것도 없이 그저 검은 막밤으로 되어 있다. 오늘은 초승달이 뜨는 하룻날이었다. 초승달이 뜨는 초하룻날 밤이면 라마 곳곳에서 의식을 가장한 술판이 벌어졌고, 경비는 허름해지기 마련이었다. 그틈을 노리고 황제 암살을 노리는 이들은 차고 넘쳤다. 때문에 초하룻날이면 황제는 신전으로 몸을 피했고, 이것을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후….
리쿠가 옅은 숨을 뱉어냈다. 어깨를 살짝 떨고 있는 듯하기도 했다. 담 그림자에 녹아들어 잠복 중인 그들 사이로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후아…. 리쿠가 간신히 숨을 뱉어냈다.
…숨소리를 죽여라, 리쿠.
앗, 죄송해요, 대장님!
가쿠는 괜히 리쿠에게 차가운 소리를 했다. 리쿠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 가쿠와 얼굴을 마주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쿠와 눈을 맞췄다. 가쿠는 그 모습이 퍽 귀엽다는 생각이 치밀었지만, 그저,
가깝군. 제대로 앞을 봐라.
하는 모난 소리를 했다. 어차피 오늘이면 이 세상에서 사라질 아이였다. 반란군이 침입하니 소장으로서 그들을 제거하라는 건 그 빌미에 불과했다. 새장에 갇혀 있던 아이가 숙련된 반란군을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리쿠에게 반란군을 처치하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애초에 황제 암살을 노린 자들이 황성에서 멀찍이 떨어진 서쪽 첨탑으로 침입한다는 전제 자체가 석연찮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새장 속에서 세상 밖으로 막 나온 어린 새는 모든 것에 눈을 빛내며 반응했다. 가쿠가 내민 라마 제국의 문양이 박힌 날카로운 단도에도, 마르고 거친 땅에서 끈질기게 자라나는 갈풀에도, 세상에 고작 한 발자국 내딛은 본인의 발마저도.
펑-!
폭발음과 함께 주홍빛이 밤하늘에 나타났다 사그라들었다. 반란군의 신호였다. 가쿠는 허리에 찬 검을 뽑으며 리쿠에게 준비해라, 하고 묵묵히 말했다. 펑, 한 번 더 폭발음이 들려오는 동시에 연기가 주위를 둘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리쿠의 등이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가쿠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아홉, 아니 열… 열에서 열하나 정도. 그중 하나는 분명 리쿠였다. 가쿠는 일단 뒤로 물러나 등을 성벽에 바싹 붙였다. 가쿠에게 주어진 명령은 오직 한 가지. 이곳에서 살아남는 건, 가쿠 혼자일 것.
누군가 가쿠에게 달려들었다. 누군가들이 가쿠에게 달려들었고, 그들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주위의 연기가 걷혀갔다. 가쿠는 한 번 검을 위에서 아래로 크게 털었다. 검에 묻은 피가 바닥에 선을 그으며 자국을 남겼다. 가쿠는 검집에 검을 집어넣고, 시신들의 숫자를 세었다. 암살자가 몇 명 침입했고, 그들을 몇 명 죽였다는 기록을 남기는 것까지가 가쿠의 일이었다. 임무 도중 부하가 몇 명 죽었는지 기록하는 것 역시 대장의 일이었다.
하나, 둘, 셋,… 여덟. 숫자가 턱없이 모자랐다. 리쿠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최소 열은 있어야 했다. 그때 사체에 꽂힌 익숙한 형태의 단검이 눈에 박혀 들어왔다. 가쿠는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 허리를 숙여 단도를 뽑아냈다. 뽑아내는 반동으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칼날에 음각으로 새겨진 라마 제국의 문장이 시붉게 빛을 발했다. 문득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가쿠는 머리를 들었다. 저 멀리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리쿠였다. 사체 사이로, 허벅지까지 오는 마른 갈풀들 사이로, 리쿠가 홀로 서 있었다. 리쿠는 홀연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언어, 알 리 없는 오싹함에 가쿠는 숨이 턱 막혔다.
아, 아, 어떡하지?
노래를 마친 리쿠가 양손으로 제 뺨을 붙잡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타인의 선혈이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고개를 돌려 가쿠를, 세상을 눈에 담았다. 리쿠의 눈 속에서 모든 것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대장님, 어떡해? 리쿠,
붉은 눈동자가 호선을 그리며 검붉게 휘었다. 눈동자에 맺힌 짙붉은 세상이 이지러졌다.
기분이 너무 좋아.
저 멀리서 바람이 불어왔다. 검푸른 갈풀들이 속절없이 흔들리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초승달이 밀려드는 밤구름에 좀먹혀 들어갔다. 첫밤이 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