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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 : 츠나시 류노스케x야오토메 가쿠

LAG (@ lAg_trg)

*

 붉은 용에 대해 알고 있어?

 그 용을 본 사람은, 불행에 빠지거나

 혹은

 단 하나 뿐인 짝이자 주인이 된다고 해.

 

 

 “…그딴 거 있을 리가 없잖아.”

 어린 시절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말했다. 그럼에도 그 낡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과거의 나는, 미래에 붉은 피가 묻은 검을 들게 된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말할까.

 ―도망치고 싶어?

 그 물음에게서 줄곧 쫓긴다. 보이지 않는 족쇄는 몸부림치면 칠수록, 얽히고 얽혀서 곧 제 목까지 조여 버리기 시작한다. 별의 하나 뿐인 왕자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 무거운 검을 들어야만 했다. 제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겉으로 보기에 아버지는 백성 모두가 바라왔던, 별을 혼란시키는 반란을 진압해 평화를 되찾아준, 지혜롭고 강한 왕이었으나 가장이자 아버지로서는 최악이었다.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많아졌다. 언제나 창문 밖을 말없이 바라보는 날이 많아졌다. 책을 읽어주다 목소리가 뚝 끊겨 실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면,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래서 몇 번이고 자는 척을 했다.

 “떠나세요, 어머니.”

 “…널 두고 어떻게 가니.”

 “괜찮아요. 저는 어른이 되면, 어머니를 뒤따라갈게요.”

 혼자 있는 것보다도, 어머니의 우는 모습이 더 보기 힘들었다. 나이에 비해 일찍 철이 든 왕자는 언젠가 이 큰 성을 떠날 것이다.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했다. 어머니가 남긴, 낡은 책을 손에 꼬옥 쥐었다. 언젠가 만날거라 믿는 넓은 세상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아침부터 이게 무슨…”

 오랜만에 옛 꿈을 꾸었다. 그 탓에 아침부터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이제는 흐릿해져 잘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아서 기쁘다고. 무작정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어디를 가라고요?”

 “베스티아.”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그곳은 충분한 자원이 있는 곳이다. 예전부터 우리는 베스티아를 견제해왔어. 옛날의 베스티아였다면 손쉽게 빼앗을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지. 내전 때문에 너무 멀리 와버렸어.”

 “…하, 참 가볍게 말하는군. 벌써 다른 별을 넘보는 거냐?”

 “베스티아는 시작일 뿐이지. 우리에게는 충분한 힘이 있다.”

 처음에는 존댓말을 하던 가쿠가 화가 치밀어 곧 말이 짧아졌다.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기분이었다. 저 놈의 고집은. 어찌됐든 저 말을 거스를 권리 따위, 자신에게는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수많은 상인이 거쳐 가는 만큼 듣는 귀가 많았고, 그만큼 소문도 빨리 퍼진다. 아침부터 불길했던 예감은 이거였나.

 

 “소문대로 정말 사람이 많군.”

 배에서 내리자마자 항구에서 왁자지껄한 상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옆에서는 같이 온 동료가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나세 리쿠. 앳된 얼굴의 그는 저와 같이 혹독한 훈련을 받아온 자였다. 그 누구도 저 자가 한 부대를 이끌 것이라고는 생각 못 하겠지. 안 그래도 붉은 머리에 검까지 허리에 차고 있으니 눈에 띄었다.

 “어이, 나나세. 그만 두리번거려.”

 “에― 그치만 신기한걸! 가쿠는 안 그래?”

 “…뭐, 확실히 색다르긴 하네.”

 “아! 이거 맛있겠다. 저기요! 이거 얼마예요?”

 제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건지. 한눈판 사이에 금방 상인에게 다가가 간식을 사고 있는 모습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또 한 번 이름을 부르려다, 뒷모습에서부터 신난 게 느껴져 그만두었다. 그렇게 말하는 가쿠 또한 내심 들떠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이리도 활발한 별이 또 있을까. 고향인, 라마는 긴 내전의 시간 탓에 주민들은 경계심이 심한 편이었다. 다른 별과의 왕래가 잦지 않은 탓에 모르는 별의 사람들을 보면 몸을 피하기 급급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기본적으로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오곤 했다. 그 탓에 라마의 사람들은 철의 심장을 갖고 있다는 소문으로 자자했다.

 “아, 가쿠. 나 혼자 가보고 싶은 곳 있으니까 먼저 숙소에 돌아가 있어!”

 “알았으니까, 조심히 들어와.”

 손을 크게 붕붕 흔든 뒤 바쁘게 사라지는 뒷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다. 저러다가도 가끔, 아무런 표정 없이 단검을 날리는 모습을 보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왕 왔으니, 첫 날 정도는 놀아도 되겠지.”

 써야할 보고서도, 해야 할 조사도 많았지만 그보다도 제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베스티아의 사람들은 모두 동물의 피가 흘러 그 특징을 갖는다더니 정말이었다. 털이 복슬복슬한 귀를 갖은 자도 보았고, 풍성한 꼬리가 달린 자도 있었으며 뿔이 달린 자도 있었다. 주민 모두가 이리도 웃으며 생활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이 라마가 생각났다.

 “실제로 보니 더 신기하군.”

 그렇게 중얼거릴 때, 멀리서 누군가가 목소리 높여 화를 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우두머리라면, 그에 답게 행동하시라고 했지 않습니까!”

 “미안, 미안. 옷이 찢어질 줄 누가 알았겠어?”

 “정말이지, 여벌 옷 들고 다니는 것도 힘들다구요!”

 “그러니까 이오리, 고기를 더 먹는 게 좋아?”

 “당신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싶더니, 골목 밖으로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한 남자는 짙은 남색 머리에 모자를 쓰고 화를 내던 장본인이었다. 그에 반해 옆에 있던 남자는 훨씬 키가 크고 피부색도 어두웠다. 남자가 상반신에 걸치고 있던 옷은 온통 찢어져 거의 천쪼가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위에 목걸이와 여러 장신구들이 부딪히면서 짤랑짤랑 시끄러운 소릴 내었다. 한참을 티격태격하다, 갈색머리의 남자가 문득 가쿠가 서있는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가쿠는 저도 모르게 천막에 몸을 숨겼다. 아까 분명 ‘우두머리’라고 하였다. 베스티아를 통치하는 자인가? 그렇기엔 너무나도 자유로워보였는데. 저를 보진 못하였을 테니, 이쯤 되면 어딘가로 갔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던 가쿠는 걸음을 옮기자마자 이내 우뚝 멈추고 말았다.

 “안녕. 여기서 뭐해?”

 “…어, 어떻게.”

 “아 그게, 내가 제일 잘 맡는 냄새가 세 개 있거든. 하나는 고기, 하나는 이오리, 하나는.”

 

 “철.”

 그 목소리가 누구보다 낮고 차갑게 내려앉았다.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태양보다 빛나는 금안이 날선 검처럼 꿰뚫는 듯 했다. 마치 야생동물을 마주한 느낌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더 이상 공간이 없었다. 이 자는 무슨 피가 흐르는 거지? 겉으로 보기엔 전혀 그런 특징이 드러나지 않았다.

 “미안, 미안. 놀라게 했어? 이오리가 다른 별 사람들한테 예의 있게 대하라고 했는데―”

 또 혼나겠군. 아까의 그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금세 개구진 표정으로 변했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어쨌든, 나랑 같이 가줘야겠는데.”

 결국은 붙잡혔다. 울창한 숲 속으로 들어가고, 들어가고 또 들어갔다. 그 끝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혹시, 이 작은 마을의 우두머리란 뜻인가? 조금은 안심했다가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나 고민이 앞섰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란 거지?”

 “그니까. 계속 여기에 있어야한다고.”

 “왜.”

 “그야, 여길 침략하려 하잖아?”

 벌써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러니 될 리가 없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건 소문이야. 참고로 나는 반대하는 입장이고.”

 “어쨌든 정보 수집을 하러 온거지?”

 “…….”

 “거봐.”

 제가 맞았다는 듯 입꼬리 올려 웃었다. 아까 봤던 마을에서 조금 더 올라오니 큰 동굴이 하나 있었다. 여기서는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여러 개의 촛불이 동굴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생전 처음 이런 곳에 앉아있으려니 약간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이 남자는 여기서 생활하는 건가?

 “넌, 이 동굴에서 사는건가?”

 “응.”

 “왜?”

 “이게 편하니까.”

 단순명료한 답이었다. 무슨 질문을 할 때마다 이러니, 이쯤 되면 그냥 생각하는 대로 답하는 것 같다. 아까 봤던 남색 머리라면, 뭔가 알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아까 그 녀석은?”

 “누구, 이오리?”

 “어. 그 녀석은 어디 있지?”

 “이오리는 네 동료를 찾으러 갔어.”

 “…뭐?”

 “아, 이상한 짓은 안하니까 걱정마. 너도 이렇게 멀쩡하게 있잖아?”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생각보다 침착한 제 자신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래서, 네 이름은?”

 “츠나시라 불러.”

 “나는 야오토메 가쿠다.”

 “…가쿠.”

 “어, 어.”

 머릿속에서 각인하는 듯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괜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어버버하며 대답했다. 그 반응에 웃긴 듯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괜히 머쓱해져 뒷머리를 만지작댔다.

 “그럼, 이제 주변 구경이라도 하는 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적극적이네. 아, 검은 여기에 놓고 가고. 옷은 이걸로 갈아입어.”

 그 말만을 남기고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벌써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그 동굴이 아닌 평범한 집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밤에는 오지 말라고 하니 순순히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친절하고, 순수해서 이방인인 가쿠에게도 잘 대해주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검을 들지 않은 것도 10살 이후 처음이라, 기분이 이상했지만 편안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불편함이 존재했다. 내가 계속 이 곳에 있어도 되는 것인가, 언젠가는 라마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장난을 받아주다보면 그 생각은 어느 새 사라지고 만다. 어느 순간부터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생긴 라마의 남자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철의 심장을 가지지 않은, 라마의 남자. 그 말이 제법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좀 도와드릴까요?”

 “어머! 소문으로만 듣던 분이네!”

 당근이 가득 들어있는 바구니를 가쿠가 대신 들었다.

 “저,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츠나시는 이곳을 통치하는 건가요?”

 “아뇨, 츠나시님은 이 숲의 수호자세요.”

 극존칭까지 쓴다. 거기다 수호자? 흥미로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 큰 숲을 수호하는 분이시죠. 그나저나 얼른 짝이 나와야할텐데 걱정이에요. 미안해요, 지금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황급히 말을 돌리는 것을 보니 모두가 쉬쉬하는 내용인 듯싶다. 궁금증을 자극시키지만 이런 얘기를 파고들어봤자 나쁜 이미지만 생길테니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무슨 얘길 그렇게 해?”

 “깜짝아. 기척 좀 내고 다녀.”

 “저, 저는 이제 가볼게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녀의 추욱 처져있던 귀가 갑자기 쫑긋거리더니 화들짝 놀라며 멀리 사라졌다.

 “너 때문에 가버렸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이야.”

 한참 흥미로운 이야기를 할 때 끼어들어서는. 가쿠가 투덜대자 억울하다는 듯 맞받아쳤다. 그 새 츠나시와도 편한 사이가 되었다. 처음엔 뭔가 우두머리라기에 대단한 남자인가 싶어, 조금 경계했지만 며칠 지내보니 그렇게 위협을 가할 것 같은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편해진 적은 없었는데. 여러모로 신기한 남자였다. 여전히 무슨 동물의 피가 섞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언제쯤 나를… 어이. 괜찮아?”

 “…잠시만, 건들지 마.”

 “너, 얼굴이 빨갛잖아. 저번에도 그러더니. 어디 아픈 거라면―”

 “괜찮, 으니까. 한동안 동굴엔 오지 마.”

 그러곤 또 다시 혼자 어디론가 가버린다. 저 녀석이 제멋대로인 것은 일상이었지만, 저런 상태가 벌써 몇 번이나 이어졌다. 어디 아픈 게 아니냐고 물어봐도 답해주지 않고 또 하루 이틀씩 제 앞에 나타나지 않고는 했다. 결국, 이번만큼은 말을 듣지 않기로 했다.

 “여긴 또 왜 이렇게 어두워.”

 동굴 내부는 촛불이 없으면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조금 나았지만 벌써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큰일인데. 이러다 마을로 내려갈 때 길이라도 잃겠어.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에 발길을 돌렸을 때, 누군가가 제 팔을 당겼다. 쿠당탕, 꽤나 큰 소리가 울려 퍼지고 등은 딱딱한 바닥에 부딪혀 아픔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제 눈앞에, 번뜩이는 두 개의 금안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그 날이 생각났다. 날선 야성. 어둠 속에서도, 츠나시의 얼굴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지.”

 낮고도 달뜬 목소리였다. 역시, 열이 있는 건가? 처음과는 다르게, 가쿠는 겁먹지도 않고 제 손으로 이마를 댔다. 마치 데일 것 같은 열이었다. 대체 이렇게 둘 때까지 뭐한 거야?

 “아프면 말을 해야 될 거 아냐. 내가 지금 약을―”

 “그딴 건, 듣지도 않아.”

 “뭐?”

 “이건, 병이 아니야.”

 “병이 아니면, 고칠 수 없는 그런건가?”

 “…네가, 고칠 수 있어.”

 

 “하아…, 이대로 네 별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평생 내게 묶여버린다면, 너는 도망갈 건가?”

 어느 새 제 귓가에 닿는 뜨거운 숨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조용한 동굴 내부에 심장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슬슬 츠나시의 몸이 한계임을 짐작했다. 동굴 입구에 비추는 달빛이, 오늘이 만월임을 알려주는 듯 했다. 그 말에 가쿠는 책에서 본 붉은 용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릴 때 바라고 바라던, 저를 데리고 도망가줄 그 존재를 평생 찾아다녔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함께 도망쳐 줄, 평생의 짝을.

 “바보 같은 질문을 하네.”

 “…뭐?”

 “내가 너에게 묶이는 게 아니라, 네가 나한테 묶이는 거다.”

 이제는 그 질문에게서 쫓기지 않을 것이다. 그 끝이 어디가 될지 그 누구도 모르지만, 이 자와 함께라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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