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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쿠야 나기 & 타카나시 츠무기

Write.  연전(@HWxyat1ILdrkHJT)

프롤로그

 

 

 

 

 첫 만남에 농구. 꽤 당혹스러운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방금 만난 사람답지 않은 팀워크를 과시하며 게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심판의 휘슬에 생긴 잠깐의 쉬는 시간. 리쿠가 놓치고 만 공은 입구 쪽으로 굴러가 한 레이디 앞에 멈춰 섰다. 언제 들어왔지, 누구일까나. 이마에 손을 올리고는 확인하려는 찰나 들려온 외침.

 "히, 힘 내세요!"

 어라.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온 시야에 들어온 한 사람. 설마, 설마. 제게 말한 것이 아님에도 마음을 울려대는 한마디. 귓가에 아른거리는 목소리가 오래 전의 그리운 추억을 끄집어냈다.

*

 기분 전환을 위해 카페로 향하던 어느 날. 길거리에 우두커니, 오도가도 못 하는 소녀를 보고 그냥 지나치기도 신경 쓰였다. 소년의 얼굴에 스치는 물음표. 다가가도 괜찮은 건가, 열댓 번이고 망설이다 행동으로 옮긴 건 서로 눈이 마주치고 나서였다.

 ─길을 잃은 건가요?

 노스메이아 사람이었기에 당국의 언어로 말을 거는 건 당연한 일. 그러나 못 알아듣는 입장으로는 더 곤란에 빠질 뿐이었다. 고개를 갸웃. 외국인인가, 하고 생각에 잠길 즈음.

 "그, 저…."

 정돈하지 못한, 당황이 스며든 단음에 소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채 단어를 이루지 못한 소리임에도 분명한 일본어의 흔적. 몇 초간의 공백을 뚫고 소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일본인?"

 어라. 굳어버린 몸짓이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일본어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한 거겠지. 느리지만 차분한 말투. 소년의 표정이 진지했다. 방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시선이 오롯이 소녀를 담았다.

 "일본어를… 아시나요? 저, 길을 잃었는데 도와주세요!"

 다급한 목소리에 소년이 대답하려는 순간. 딸랑, 저 옆쪽 카페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쪽에서 나온 남자와 소년이 마주치자 자연스레 소녀에게로 옮겨가는 눈길. 누군지 묻는 눈짓에는 묵묵부답으로 답해주었다.

 ─무슨 얘기 중이었는진 모르겠지만 들어와서 해. 춥지 않아?

 못 알아듣겠어. 소녀의 떨리는 눈빛이 소년을 향했다. 소년이 남자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 아이 일본에서 왔습니다. 길을 잃어서 도와달라고. 의외의 사실에 남자가 소녀를 바라보았지만 겁을 먹은 눈치였다. 위축된 것 같으면서도 일본어를 아나 싶어 놀란 듯 했다.

 "나도 일본에서 왔어. 이렇게 말하면 조금은 겁을 덜 수 있으려나? 일본에서 온 천사라니 반갑네."

여기에는 천사가 많으니까. 일본에서 왔어도 지금은 노스메이아에 있으니까 천사인 걸로. 소녀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건지 시답잖은 말까지 덧붙이며 말을 건네는 남자.

 "얼른 가야 하는 거면 나도 강요는 못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잠깐 차라도 마시고 갈래?"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며 소년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던 아이의 생각은 달랐으니. 머리는 얼른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으나 마음은 애초에 조금 놀다 들어가기로 한 거라며 빙빙 돌고 있었다. 바로 돌아가면 후회할 것만 같아 끄덕이고 만 고개. 예상치 못한 반응에 소년의 눈이 조금은 커졌다 돌아왔다.

 손님은 방금 들어온 둘 뿐이 없는지, 아니면 아직 오픈을 하지 않았는지 한적한 카페 안. 차를 내오겠다며 들어간 남자 덕분에 홀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입을 열지 않는 소년과 안절부절 못하는 소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까 머리를 열심히 굴리던 차에 소년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에서, 어쩌다 노스메이아에?"

 "가족이랑 같이 여행 왔어요. 너무 예뻐서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길을 잃어서…."

채 정리하지 못한 대답이건만 소년은 다음 질문을 던지려 하고 있었다. 소리 내기 직전에 남자가 끼어들었지만. 오케이, 거기까지. 쟁반에 얹은 두 찻잔을 차근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름도 모르는 채 이런 질문은 조금 서글프지 않아? 긴장 좀 풀고서야 물어봐야지, 첫 만남에 이러면 누가 대화하고 싶겠어. 그치? 동의를 구하는 모습에 소녀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것 봐. 이런 곳에선 이름부터 묻고 친해지는 거라고. 우리 천사는 이름이?"

 "타, 타카나시 츠무기에요."

 소녀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느리게 대답해나갔다. 소년에게 다음은 네 차례라고 말하는 듯한 남자. 소녀의 조심스러운 관심도 그 뒤를 따랐지만 소년은 이름을 밝힐 생각이 좀처럼 없어 보였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네. 이 녀석, 자기 이름 밝히는 걸 쑥스러워하거든. 내가 대신 말해줄게. '하루키'라고 부르면 돼."

 '하루키'라고 불린 소년의 고개가 순식간에 남자에게로 향했다. 추궁하는 것처럼 가늘게 뜨인 눈. 남자가 모르는 척 고개를 으쓱했다. 그야 나하고 처음 만났을 때도 신상 알리기 껄끄러워했으니까, 이름 밝히기 불편한 거면 이쪽이 낫지. 속으로 해명하며.

 "그럼 아저씨는요?"

 아저씨라는 호칭에 남자가 조금 휘청인 것 같지만 금방 중심을 잡았다. 내 이름은 비밀.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가 더 물을 이유는 없었는지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애써 내와준 차를 마시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뒤늦게 들어 올린 찻잔. 앗뜨, 허겁지겁 마셔보려다 혀가 데여 손이 흔들려버렸다. 내용물이 쏟아지면 더 큰일이 날 터. 소년이 찻잔을 받혀 들었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았다.

 ─괜찮아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간 노스메이아어에 두 사람 모두 흠칫. 남자가 찬 물을 가지러 간 사이 둘만 남은 순간이었다.  소년이 한층 가라앉은 텐션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이번에 나온 소리는 일본어.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던 차가 움직임을 멈춰갔다. 소년이 손을 뗐다.

 "미안, 차 마시라는 강요는 아니었는데. 너무 뜨거웠나 보네."

 소녀가 남자가 내온 것을 두세 모금 들이켰다. 소년의 푸른빛 눈동자가 조용히 일렁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느끼는 새로운 감정. 남자가 소년을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츠무기는 음악 좋아하니? 하루키는 음악을 좋아해서 종종 여기 오는 거거든. 혹시 괜찮다면 피아노 연주 듣지 않을래?"

 피아노? 음악을 좋아하냐는 말에 소녀가 긍정을 표했다. 아까에 비해 눈에 띄게 활발한 반응. 조용한 음악도 좋아하지만, 아이돌 노래라거나! 그런 쪽도 좋아해요. 아이돌이라. 남자의 입꼬리가 조금은 씁쓸해 보였다.

 "그래? 그럼 더 좋지. 노래 부르는 건 좋아해?"

 "노래는… 그렇게 잘 하는 건 아니지만. 부르는 건 좋아해요."

 "그걸로 충분해. 노래는 듣고 부르는 사람이 좋아하고, 행복하고, 치유 받기 위해 만드는 거니까."

 두 아이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려는 듯. 남자가 손뼉을 짝 마주쳤다. 자연스레 시선이 따랐다.

 "멋진 밴드는 없지만 피아노 한 대로도 멋진 연주를 보여줄게."

 소녀가 신나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년도 뒤늦게 일어나 피아노 쪽으로. 뚜껑이 열리고 앞쪽 의자에 남자가 자리잡았다. 별다른 악보는 필요 없었다.

 "하루키는 저번에 들어본 적 있을 거야. 츠무기는 아는 노래였으면 좋겠다."

 남자가 건반을 두드리자 두 아이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한쪽은 저번의 그 곡이 '아이돌'의 노래였나 싶어서. 또 다른 쪽은 익숙한 이 노래를 여기서 듣게 될 줄이야, 하고. 저마다의 이유로 빛나는 눈이 마주쳤다. 아. 소년은 다시금 감정을 떠올렸다. 소녀는 싱긋 미소 지었다.

 "이거 제로의 노래 맞죠! 무슨 이유에선지 사라져버린…, 전설의 아이돌, 제로!"

 활짝 핀 소녀의 얼굴에 소년의 감상마저 녹아 드는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선율과 눈을 뗄 수 없는 감정. 더는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아 밑으로 관심을 돌리자 언제 봐도 화려한 손놀림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 하이라이트가 흐르던 찰나 끊겨버린 흐름. 음을 따르던 두 아이의 낯빛이 흔들렸다. 남자만이 여유로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하루키, 혹시 괜찮다면 이 뒤는 네가 연주하지 않을래? 저번에 했던 거 기억하지. 남자의 말이 들려오자 소년은 다소 표정을 구겼다. 왜 내가. 하지만 싫다는 생각 너머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은 남자가 비켜난 자리에 소년을 자리잡게 만들었다.

 호기롭게 앉았으나 소리를 내는 건 또 다른 차원. 지켜보는 이 때문일까, 분명 처음이 아닐 텐데도 쉽사리 힘을 싣지 못하는 손가락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힘 내세요, 소년의 동공이 흔들렸다. 소녀의 곧은 표정이 소년과 마주했다.

 “힘 내세요!”

무겁던 감정에 살랑 바람이 내려앉았다.

남자보다 뛰어나지는 않으나 따스하면서도 고운 음색. 소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감탄이 흘러나오는 만큼 채워져 가는 소년의 마음. 이윽고 마지막 음이 홀을 메웠다. 잔잔한 울림이 천천히 스러져갔다.

 "역시 잘 하네. 연주하길 잘했지?"

무표정을 그리면서도 소녀를 향하는 눈길은 숨길 수 없었다. 제 연주에 저렇게 환히 박수를 쳐주는 기분이 새롭고도 나쁘지 않았다. 기뻤다. 못내 소년의 얼굴에도 자그마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소녀에게 닿기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연주 들어줘서 고마워. 우리도 더 연주를 들려주고 싶지만, 츠무기는 이제 가봐야 하는 거 아닐까? 슬슬 돌아가야 걱정 끼치지 않을 거야."

 아 맞다.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입을 막고 숨을 들이마셨다. 너무 까맣게 잊고 있었어. 허겁지겁 허둥대는 모습에 남자가 소녀를 진정시켰다. 그렇게 서두르지는 말고.

 "연주도 차도 감사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또 와보고 싶어요!"

 "그럼 우리도 환영이지. 오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와."

 남자가 손을 흔들고는 가게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소년도 어느 새 자리에서 일어나 소녀의 곁에 서 있었다. 남자가 소년의 등을 떠밀었다.

 "길 잃었던 곳까지 하루키가 데려다 줄 거야. 걱정은 안 해도 돼."

 소녀가 소년을 바로 바라보았다. 고갤 끄덕이더니 말 없이 카페 문을 열고 기다리는 소년. 안녕히 계세요! 소녀가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나오자 문을 닫고 걸어왔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하루키도 일본에서 왔나요?"

 "전 노스메이아 사람입니다. 일본어를 아는 건 어머니께서 일본인이시라."

 저 아이가 어디서 왔는지는 짐작 가는 곳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조금은 늦게 나와버린 대답.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일본으로 올 수도 있겠네요? 만약 오게 된다면 일본에 대해서 많이 얘기해드릴게요. 알고 싶어 하던 거 맞죠. 아이돌 노래도 같이 들어요. 소년은 역시 한 박자 늦게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근처 숙박 시설은 이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나올 겁니다."

 "여기서부턴 알 거 같아요! 정말 고마워요, 하루키!"

 감사는 이쪽에서 해야 할 것 같은데. 목까지 차오른 말은 내지 않고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소녀의 손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가벼운 입맞춤을. 소녀가 화들짝 뒷걸음질쳤지만 소년은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따스한 기운. 놀랐던 속내도 그 모습에 점점 지워져 갔다.

 "그럼 안녕히, 츠무기."

 소년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만큼 길을 나왔으면 보는 눈이 있을지도 몰라. 점점 속도가 올라가는 발걸음은 질질 끌리는 듯 어딘가 무거웠다. 이대로 돌아가면 더는 못 보겠지. 좋은 경험이었구나, 잠깐의 만남을 그리 보내야 했건만 어쩐지 마음이 아려왔다.

*

 그게 끝일 줄 알았다. 좋은 경험이었을 뿐의 잠깐의 만남. 당신이 노스메이아를 떠나는, 제가 카페에 들르지 못했던 그 날. 잠깐이나마 찾아왔었으나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다는 말에 다시는 못 볼 줄만 알았는데.

재개된 경기 중간중간 당신에게로 향하는 눈길을 돌리려 애썼다. 당신이 보는 앞에서 실수할 수는 없다. 끝까지 집중해서 좋은 결과를 얻어내고 싶었다.

 이윽고 시합 종료. 결과는 12대 12로 동점. 다행이다, 따라잡았구나. 기쁜 마음으로 모두가 모인 자리에는 우리들의 '매니저'의 소개가 이어졌다. 매니저, 그렇구나. ‘타카나시’ 프로덕션. 그 순간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만 같았다. 확신이 차오르는 순간의 기쁨을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모두를 지켜보았다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소가 차올랐다.

 "나도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마드모아젤."

당신의 손을 살짝 들어올리더니 가벼운 입맞춤을. 당신의 놀란 표정이 눈 앞에 그려졌다. 그 때와 똑같은 반응. 하지만 더는 놓칠 수 없다. 손을 그대로 끌어와서는 당신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두근대는 이 소리가 들키지 않기를 자그맣게 바라며.

 "손가락에 하는 키스는 단순한 인사가 아닙니다."

 두 사람의, 사랑의 프롤로그.

 당신이 저를 알아보지 못한대도,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한대도. 마지막 인사는 첫 인사로 바꾸어 새로운 시작을. 기적적인 프롤로그는 어떤 에필로그를 맞게 될지. 적어도, 앞으로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을 겁니다.

다시 만나 반가워요, 츠무기. 저만이 생각할 수 있는 말이라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기쁜 마음으로 다짐을 이어나가겠습니다.

 방방 뛰는 마음에 미소는 떠날 줄 몰랐다. 웅웅, 심장이 울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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