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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죠 텐 & 나나세 리쿠

Write. 릴리(@LillyChuoChou13)

소년과 소녀는 어느 초여름 날 벚꽃을 보았다

*

 

 츠무기는 꿈을 꾼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사람들을 헤치며 아버지를 찾는다. 오토하루를 찾는다. 낯선 그들의 한가운데에 오토하루가 있다. 츠무기는 오토하루에게 달려간다. 오토하루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츠무기가 손을 잡으려는 찰나 그의 두 다리가 무너진다.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두 손을 주먹 쥐고 바닥을 내려친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츠무기는 뒷걸음질 친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을 딛는 순간, 바닥이 무너져 내린다.

 -아빠…!

 츠무기의 몸이 서서히 추락한다.

 

 몸을 크게 떨며 츠무기는 눈을 떴다. 가쁜 숨을 내뱉었다. 심장 소리가 귓속을 가득 메웠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심장 박동이 차츰 잦아들었다. 츠무기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투과한 햇빛을, 그 속을 부유하는 먼지들을 한참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고요했다. 식탁 위에는 랩에 쌓인 그릇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츠무기는 랩을 벗기고 주먹밥 하나를 집었다. 엉성한 모양의 주먹밥은 집어 들자마자 부서졌다. 손에 남은 주먹밥을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식은 밥알이 입안에서 알알이 흩어졌다. 목이 메었다.

 

 *

 

 츠무기는 교실 문 앞을 서성이다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었다. 츠무기가 교실로 들어서자 소란스럽던 교실은 일순 정적에 휩싸였다. 츠무기는 고개를 숙인 채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아이들은 다시 각자 떠들기 시작했고, 교실은 아무렇지도 않게 소란스러워졌다. 츠무기는 책상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책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냈다. 책상 서랍에 시간표대로 교과서를 정리했다. 일주일 만에 등교한 학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낯설게 다가왔다. 츠무기는 눈을 감았다.

 -타카나시 양은….

 누군가가 수군거렸다.

 -아, 정말? 안 됐다….

 누군가들이 수군거렸다. 누군가의 손이 츠무기의 어깨를 붙잡았다. 츠무기가 놀라 눈을 뜨며 옆을 쳐다봤다. 안경을 쓴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괜찮아?

 여자아이 뒤로 귓속말을 주고받는 아이 둘이 눈에 박혀 들어왔다. 츠무기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그리고 다시 열었다.

 -난, 괜찮아.

 츠무기는 살며시 여자아이의 손을 어깨 위에서 내려놓았다. 여자아이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책상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여자아이는 무안한지 재빠르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츠무기는 책상 서랍에 손을 넣어 시간표대로 쌓여 있는 교과서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곧 종이 울리고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아침 시간 이후로 츠무기에게 말을 거는 아이는 없었다. 말을 건넨 사람은 조회 시간이 끝나자마자 복도로 불러 괜찮은 거니? 하고 물어온 담임선생님밖에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당신의 가장 상냥한 목소리로 힘들겠지만 힘을 내야 한다고 했다. 츠무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체육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아이들이 교실을 다 빠져나가고 나서야 츠무기는 교실을 나섰다. 운동장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이미 정렬해 있었다. 츠무기는 아이들 사이로 들어갔다. 아니, 들어가려 했다. 체육선생님이 츠무기를 불렀다. 왜 체육복이 없냐고 물어보다 말고 혼자 아, 타카나시 양…, 하고 중얼거렸다. 잠시를 참지 못하고 아이들은 하나 둘씩 저희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츠무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배가 아파요.

 양 팔로 배를 감쌌다. 체육선생님은 츠무기에게 무리하지 말고 양호실로 가라고 했다. 보건위원을 불러주겠다고 했지만 츠무기는 혼자 갈 수 있어요, 하고 말하며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츠무기는 교사 뒤편으로 돌아가 뒤뜰 구석 화단 뒤에 몸을 숨겼다. 이름 모를 덤불이 오월의 햇살 아래 무성했다. 츠무기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를 접어 팔로 감싸 안으며 몸을 작게 웅크렸다. 배는 아프지 않았다. 아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런데도 눈이 자꾸 아려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화단으로 넘어졌다. 츠무기는 고개를 들었다. 빨간 머리의 남자아이가 넘어져 있었다. 남자아이는 앗, 넘어졌다, 하고 웃으며 일어나 무릎에 묻은 흙을 털었다.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츠무기의 뺨으로 흘러내렸다. 츠무기는 얼른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지만 눈이 빨개질 뿐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남자아이는 츠무기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화단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슬며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맑은 목소리. 맑고 예쁜 목소리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조심스럽게 츠무기에게 다가왔다. 츠무기는 슬쩍 남자아이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아이는 베시시 웃으며 눈을 감고 얼굴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보여서 츠무기는 설핏 웃어버렸다. 이윽고 노래가 끝나고 남자아이는 츠무기를 향해 방긋 웃었다.

아, 웃었다! 나는 리쿠! 너는?

리쿠가 츠무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츠무기는 리쿠를 올려다보았다. 리쿠의 머리 뒤로 비치는 햇살이 눈부셨다.

 -츠무기….

 츠무기는 리쿠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나랑 같이 모험하지 않을래?

 

*

 

 -벚나무를, 하아, 찾고 있었어.

 리쿠가 숨을 몰아쉬며 계단 위에 발을 내딛었다.

 -이 시기에?

 츠무기도 조금 거친 숨을 내쉬며 뒤쳐진 리쿠를 돌아봤다. 아래로 군데군데 풀이 나고 깨진 낡은 돌계단이 펼쳐지고, 그 아래로 츠무기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조그맣게 보였다. 이제 절반정도 올라왔다. 산 정상에 있는 신사까지는 아직 멀었다. 어린 둘에게 신사로 향하는 길고 긴 계단은 힘겨웠다. 특히 리쿠는 힘들다 못해 괴로워 보였다.

 -초등학교 뒷산에….

 리쿠가 계단을 한 칸 더 올라왔다.

 -꽃이 지지 않는 벚나무가 있을 거라고….

 한 칸 더.

 -모두가 그랬어, 분명, 아름다울, 거라고….

 한 칸 더.

 리쿠가 츠무기와 같은 높이의 계단에 올라섰다.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그걸, 텐 형아한테…, 가족한테 보여주고 싶어. 나 때문에, 꽃놀이, 못 갔으니, 까….

 츠무기를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러나 갑자기 한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다른 한 손으로 가슴팍을 잡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기침에 리쿠의 등이, 몸이 들썩였다. 리쿠가 털썩 계단 위에 무릎을 꿇었다. 츠무기는 애처롭게 흔들리는 리쿠의 등에 손을 뻗으려다 거두었다. 무서워. 츠무기는 뒷걸음질을 쳤다. 계단 모서리에 발을 헛딛는 순간, 리쿠가 츠무기의 손을 잡았다.

 -조심해…!

 콜록콜록, 리쿠가 기침을 뱉어냈다. 보다 누그러진 기침이었다. 리쿠는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러고는 긴 기침으로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츠무기를 향해 웃었다. 츠무기는 웃을 수가 없었다.

 

 조금씩 주위가 어두워져 갔다. 저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왔다. 맑았던 하늘은 둘이 신사에 도착했을 무렵에 먹구름으로 완전히 뒤덮였다.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낡은 신사는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거리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신사 옆으로 커다란 벚나무가 서있었다. 벚나무는 까맣게 죽어있었다. 리쿠가 고개를 숙였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뒷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츠무기는 리쿠의 손을 잡았다. 리쿠가 고개를 들고 츠무기를 바라봤다. 하하, 하고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툭,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빗방울은 장대비가 되었다. 굵은 빗줄기에 금세 젖어버린 둘은 신사 안으로 들어갔다. 신사 안은 어둡고 추웠다. 뒤틀린 나무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낡아서 무너진 천장으로 비가 들어왔다. 그래도 바깥에서 비를 맞는 것보다는 나았다. 둘은 그나마 아직 멀쩡한 기둥 쪽으로 몸을 피했다. 리쿠는 자꾸 기침을 했다. 아까 전보다 훨씬 심하게, 아니 비교도 되지 않게, 쉴 새 없이 기침을 했다. 끊어질 듯한 호흡이 이어졌다. 츠무기는 리쿠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나는, 괜, 찮아….

 리쿠는 츠무기를 향해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울컥, 츠무기의 목구멍까지 무언가가 올라왔다. 츠무기는 질척한 무언가를 삼킬 수가 없었다.

 -괜찮지 않아! 괜찮을 리가 없잖아! 나는 하나도 안 괜찮아! 안 괜찮단 말이야….

 울음을 터트린 츠무기가 리쿠의 품속으로 무너졌다.

 -리쿠, 죽지마. 죽으면 용서 안 할거야.

 리쿠는 아무 말 없이 츠무기의 등을 토닥였다.

 

 -일주일 전에.

 문득 츠무기가 입을 열었다. 리쿠는 옅은 기침을 뱉어냈다. 츠무기는 리쿠를 힐끔 쳐다보았다. 리쿠는 계속 이야기 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츠무기는 시선을 자신의 신발코로 떨어뜨리고 말을 이었다.

 -일주일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어.

 츠무기가 몸을 작게 웅크렸다.

 -몇 년 전부터 병 때문에 자주 아팠어. 자주 입원했지. 엄마는 몸이 다 나으면 벚꽃을 보러가자, 하고 말하곤 했어. 근데, 이젠….

 츠무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자꾸 눈이 아려왔다. 많이 울었는데도. 이미 충분히 울었는데도. 리쿠가 츠무기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츠무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죽지 않아.

 

*

 

 어느새 비가 그치고 노을이 신사 안으로 들어왔다.

 -리쿠, 저기 봐.

 츠무기가 리쿠의 어깨를 흔들었다. 지쳐서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리쿠는 츠무기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벚꽃이 있었다. 무너진 천장으로 들어온 노을이 꼭 벚꽃 같았다. 죽은 벚나무 가지에 걸린 노을이 너무, 아름다웠다.

 -예쁘네…!

 츠무기가 노을 때문에 주홍빛으로 물든 얼굴로 리쿠를 향해 활짝 웃었다.

 -응, 예쁘다….

 리쿠는 마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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